희망에 관하여

(...) 우리는 노무현 고문을 공덕동 오거리 굴다리 밑에 위치한 한 허름한 대폿집에서 만났다. 상대가 대통령 후보가 아니라 대통령 당선자라해도 절대 기죽지 말자고 다짐했건만 정작 그를 만나자 네 여자는 약간 당황하고 말았다. 정치경력 13년에 노련해질 대로 노련해진 노무현 고문이 그 경직된 분위기를 풀려는 듯 괜히 먼저 너스레를 떨었다.

"나는 이런 서민적인 장소에서 만나는 줄도 모르고 대한민국 패션계를 주름잡는 멋진 여성분들을 만난다고 해서 비서관이 하라는 대로 메이크업까지 했어요. 괜히 했나봐. 어색해 죽겠어요. 어디 가서 세수라도 하고 올까요?" (...)

이보미_ 그럼 대통령이 되면 제일 먼저 개혁하고 싶은 건 뭔가요?
노무현_ 신뢰, 원칙, 그리고 타협의 문화요. 몇 사람과의 약속은 그냥 약속이고, 많은 사람들과의 약속을 원칙이라고 하는데 그런 약속과 원칙이 지켜져야 정치, 경제, 문화 다 성공할 수 있거든요.

(...)

김경_ 따님이 정치에 관심을 갖는 게 도움이 되나요?
노무현_ 인터넷 사이트에서 도움 된느 기사를 검색해서 얘기해주면 좋죠. 오늘 같은 날 <바자>와 인터뷰가 있으니까, 자기가 학교 다닐 때 자주 신던 신발이 '무크'인데 그게 이렇다 뭐 그런 얘기라도 해주면 좋은데 안 해준다니까요.(재미있는 얘기다. 그가 아는 가장 세련된 신발은 '무크'라는 사실.)

(...)

김경_ 그럼 개인적으로 가장 행복한 순간은 언제인가요?
노무현_ 지금이 제일 괜찮은 거 같은데요. (홍_ 에이, 그런 뻔한 사탕발림 말고요.) 사실은 모두 다 잃어버렸어요. 개인적으로는... 이젠 뭐 큰 연설에서 잘 해내고, 사람들이 감동하는 모습을 본다든지 하는 게 제일 행복해요. 이미 맛이 갔어요. ('모든 걸 잃어버렸다'는 그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모두들 당황스러워했다.)

- <김훈은 김훈이고 싸이는 싸이다> 中 김경 인터뷰집. 생각의나무, 2005년.
나는 오바마의 당선과 'CHANGE'라는 구호에 환호하는 미국인들을 보면서 그것에 어떤 정치적 혹은 이해타산적 관계들이 얽혀 있든, 아직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음에 부러워했다.

2002년 12월 18일 밤, 시민들로 가득한 서울 시내에 당선사례를 하러 나온 대통령 당선자의 표정에는 피로와 감격이 교차하고 있었다. 대통령 선거라는 기나긴 여정을 지나온데 대한 피로, 당선이라는 기쁨, 그리고 여기에 대통령으로서의 사명에 대한 무게가 겹치면서 여러 감회가 교차하는 듯 했다. TV를 통해 그 장면을 지켜보면서 내가 느꼈던 것은 변화에 대한 희망이었다. 지친듯 하지만 상기된 표정으로 인사를 하는 그의 얼굴에 꼭 변화를 이루겠다는 소명 같은 것이 보였고, 그에게 박수와 악수를 건네는 사람들의 표정에서도 무언가 바뀔 것이라는, 그렇게 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 같은 것이 보였다. 세상이 정말 바뀔지도 모른다, 라는 기대 섞인 희망을 안고 나는 입대했다.

대통령 탄핵소추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나오던 날, 라디오에 귀를 쫑긋 세웠다. 탄핵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해 총선에서 여당은 커다란 승리를 거두었다. 나는 다시 한 번 세상이 변하지 않을까 라는 희망을 가졌다. 전역 후 돌아온 사회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참 오랫동안 이루어진 변화를 위한 시도가 끝끝내 좌절되는 기록을 살펴 보면서 마음이 헛헛해졌다.

집권 후기, 그리고 퇴임 후 밝혀진 그를 둘러싼 일련의-결론 내려지지 않은-사건들을 통해 그는 참 많은 비판을 받았다. 집권 후기에 그가 내린 선택에 대해 나는 어떤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결과를 놓고 보았을 때 손을 들어주기 힘든 경우가 점차 많아져갔지만, 나는 그가 처해 있었던 어떤 선택의 순간들에서 무시할 수 없는 어떤 사정이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언젠가 그것에 대해 본인이 직접 이야기하는 것을 들을 수 있게 되기를 희망했다. 전직 대통령었지만 그는 남편이었고, 아버지였고, 친구였고, 한 사람이었다. 세상 모두가 자신을 향해 돌을 던지는 것 같은 상황 속에서 자신은 물론 소중한 사람들을 지켜내지 못했던 그는 얼마나 고독했을까. 어떠한 시련이 다가와도 강한 사람은 그것을 이겨내지만 그것은 그가 강하기 때문에 시련의 고통을 느끼지 못해서가 아니라, 엄청난 고통이지만 견뎌내는 것이라는 것이 나 뿐만 아니라 그에게도 해당한다는 것을 왜 나는 이제서야 생각하게 된 것일까.

무언가의 부재는 그것의 의미를 되새기게끔 한다고 했던가. 믿기지 않는 그의 부재를 접하고나서야 나는 나에 대한 그의 의미를 정리할 수 있었다. 노무현은 나에게 희망을 꿈꾸게 했다. 갑작스럽게 날아온 소식에 사로잡힌 황망함은 차츰 시간이 지나며 가라앉게 될 것이다. 나는 그를 희망의 경험으로 기억하고자 한다. 약한 자의 편에 스스로 서려고 했던, 지치지 않는 불의에 끝까지 타협하지 않고자 했던, 필요하지만 너무 당연해서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 것을 이야기했던, 패배를 무릅쓰고 자신의 소신을 지켰던, 그렇지만 동시에 연약한 인간이기도 했던 그를 나는 그렇게 기억하고자 한다.




by 강군 | 2009/05/23 23:11 | 사는, 이야기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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